위안부 문제, 우리 정부는 제대로 일했나? 세상의 이야기


 (앞부분 생략) 1991년 8월 당시 67세였던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갖고 17세의 나이에 석 달간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하다 탈출한 사연을 공개했다. 이 때부터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가 한국을 찾았던 1992년 초까지 이 나라는 거대한 ‘위안부 문제의 불길’에 휩싸였다. 거친 시위가 줄을 이었고 일장기와 일본 정치인에 대한 화형식이 벌어졌다. 오늘 1211회를 맞는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가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위안부 문제가 터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을 향해 초강경 자세를 취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일본 총리를 앞에 두고 “역사와 국민 앞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다그쳤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초점은 위안부 문제가 아니라 일본 측으로부터 한국 무역 적자의 태반을 차지하는 대일(對日) 무역 역조 개선 방안을 받아 내는 쪽에 맞춰졌다. 당시 한·일 막후 실무 협상장에서 만났던 우리 외교관은 “위안부 문제를 대일 무역 역조와 연계하는 협상은 외교관의 양심상 도저히 못 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일 경제 협력 방안이 마련됐지만 실질적 한·일 무역 역조 개선 효과는 거의 없었다.
 일본 전문가들에 따르면 위안부나 과거사 문제를 다른 무엇인가와 연계하는 우리 측의 협상 전략은 늘 일본에 역(逆)이용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오히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테니 역사적 진실을 밝히자”고 나섰을 때 일본이 가장 당혹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 측이 위안부 문제에서 가장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평가되는 고노 담화가 그 직후에 나왔고,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일본 교과서에 실렸다.
 그러나 그 후 25년 가까이 위안부 문제는 쳇바퀴를 돌았다. 우리 정부는 일본에 국가 차원의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솔직하게 이것이 ‘쉽지 않은 요구’인지를 설득할 용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을 향해 대담한 제안을 내놓을 자신도 없었다. 그저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내외의 분노가 비등점을 향해 치달으면 임기응변식 대일(對日) 강경 태도를 취하는 데 급급했을 뿐이다. 우리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런 식으로 ‘희망 고문’을 해왔던 것이다.
 (중간 생략) 일본을 상대로 언성을 높이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국제 사회에서 우리 스스로 ‘한국의 입지’를 좁히는 것에 불과하다. 지난 3년 이 정권이 보여준 대일(對日) 외교의 실패가 바로 산 증거다. 한·일 관계는 위안부 협상 타결로 다시 출발점에 섰다. 지금이야말로 일본이 한국을 두렵게 여기도록 만드는 발상의 전환과 외교 전략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김학순 할머니는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김 할머니를 비롯해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던 200여 분 중 46명만이 생존해 있다. 일본 탓만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진심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듬었으면 한다.
- 박두식 조선일보 사회부장,
30일 조선일보 ‘박두식 칼럼’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달성한 박정희 정부 때야 위안부 문제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
박정희 정부에 책임을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쳐도,
노태우 정부 이래의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의지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푼돈은 필요 없다”는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말씀도 그렇고
그 YS·DJ안(배상은 없다)이 일본을 당황하게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노무현이야 뭐 나눔의 집 길막한 단계에서…….

위안부 문제를 놓고 한국 내 여론이 분열되는 것은
상당 부분 노태우 정부 이래의 한국 정부의 책임도 있다는 말이지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한국 정부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덧붙임: 트랙백 연결된 글과 더불어 뉴스비평 밸리에서 역사 밸리로 옮깁니다.

덧글

  • 잠꾸러기 2015/12/30 13:41 #

    이 사안에 대한 전향적 노력의 시작은 YS가 선구자라고 볼수 있군요....-_-

    돈이나 정치논리를 엮지 않고 인권이나 역사적 사실같은 본질적 부분에 집중할때 이 문제가 해결될 실마리가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이 협상카드로 한몫 잡거나 순간 면피하려는 정치인은 욕먹어야죠.

    지금 대통령이 이 협상을 잘했다고 훗날 평가받으려면 자기 아버지와 연결된 고리도 인정할건 인정해야 될텐데.... 이분이 워낙 효녀(?)라서 불가능할듯...--;;
  • 바탕소리 2015/12/30 13:45 #

    1.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 재평가행.

    2. 독일이 돈다발로 주변국들을 구워삶은 게 아니니까요.

    3. 위에서도 썼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위안부의 존재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아서 말입니다.
  • 잠꾸러기 2015/12/30 13:52 #

    1. 두 전직 대통령이 지금와서 보니 걸물은 맞는듯....

    3. 원조가카 시절에는 정부차원에서 제대로 몰랐을 확률이 높습니다. 해방후 20년인데 그 시절에는 피해자분들은 대부분 숨어지냈을 시기입니다. 먹고사니즘이 우선이던 시기에 개인의 인권, 특히 여성인권은 존중받기 힘듭니다. 이 부분을 감안하면 원조가카에게 위안부 문제를 독박 씌우는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당시 협상을 조금만 더 길게 보고 했더라도 지금의 논란은 많이 감소되었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존재하는거죠. 그리고 지금 정부의 홍보부족,소통부족은 까여도 할말 없습니다. 같은 여당이지만 MB시절이 지금보다 더 나아보이니....
  • 바탕소리 2015/12/30 16:17 #

    1.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과 대결할 수 있었겠지요.

    3-1. 여성인권을 떠나서 박정희 정부 때는 위안부의 존재 자체가 사회에 드러나기 한참 전이었지요. 1991년에야 할머니들 스스로가 밝히면서 드러났으니.
    3-2. 외교부 차관급 인사들이 위안부 할머니들과 면담했다는데, 윤병세 외교부 장관님 본인은 왜 안 오시는 겁니까.
  • 드라이플라워 2015/12/30 14:01 #

    우리 정부는 너무 자주 골대를 바꾸고 심지어 옮기기를 서슴치 않고 해왔죠..ㅠㅠ..

    솔직히 이 부분은 이해가 될수 밖에 없군요..ㅠㅠ
  • 바탕소리 2015/12/30 16:18 #

    땜질 처방만 계속하다가 호미로 막을 수 있던 걸 박근혜 정부가 가래를 들게 만들었죠.
    (박근혜 정부가 가래질을 제대로 하느냐는 다른 문제)
  • 레이오트 2015/12/30 14:02 #

    1. 어떤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때 다른 무언가를 그것과 연계해서 해결하려는 전략은 해결역량을 분산시키는 건 말할것도 없고 되려 역공당할 여지를 늘릴 뿐이지요.

    2. 분하고 안타까운 일인데 동서고금 막론하고 이런 류의 피해자들은 정치가에게 "좋은 카드"로 인식됩니다. 특히 서로에 대한 무지, 무시, 공포, 증오와 같은 부정적 인식과 감정이 한가득인 한일 관계에서 이런 류의 피해자들은 밑져도 본전 이상을 뽑는, 어떻게든 잡고 흔들어야만 하는 패이지요.

    3. 좀 노골적으로 말해 한국 입장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는 영원히 잊고싶은 일제시대의 PHANTOM이 만든 부끄럽기 그지없는 PHANTOM PAIN인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피를 좀 흘려도 곪은 상처를 제대로 찢어내야 한다는 어느 괴짜 신경정신과 의사 말대로 그 PAIN의 근원을 알아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
  • 바탕소리 2015/12/30 16:20 #

    1. 우리의 약점을 늘릴 뿐이지요.

    2. 탈북 동포, 국군 포로 등과 같은 ‘역사의 조난자’들이 바로 위안부 할머니들이지요.

    3. 그렇습니다.
  • 2015/12/30 15:0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12/30 16:2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Real 2015/12/30 16:24 #

    이래서 금전은 안받아도 되는 수준에서의 가장 중요한 것이 명분인데.. 그 명분에서 구멍을 만들어준 정도가 아니라 고속도로를 깔아주는 모호성의 표현들로 가득하여 합의를 본 현 행정부가 과연 설득력이 될까요? 사실상 지금 설득이라는 문제는 일본만 바라보는 격일뿐 한국이 뭔가 나설수 있는 설득이라는게 없습니다. 결국 박근혜 행정부는 자기 주도보다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을 또 택한 셈이죠. 정작 그러면서 준비도 없고요. 전략이 없으니 뭐가 중요한지 알 턱이 있나요?

    김영삼 행정부 시절언급에서 명분이라는 역사적 사실 문제에 대한 문제를 관철시켜야만 하는 문제에서 미국이 밥상까지 차려주고도 떠먹지를 못하고 자기 입맛대로 소식을 했으니 전 과연 토론 잘 못하는 박근혜화법이라는 괴상한 소통을 자랑하는 대통령께서 설득을 할수 있을지 여부가 궁금합니다. 일본만 바라보고 앉은 형국에서 뭘 하겠다는건지 전 모르겠으니까요. 아니면 일본이 주장하는 불가역적 해결이 안되는걸알고 깨지기를 기다리고 있는걸까요? 애초에 이정도로 반발이 나오는건 아베나 박근혜나 지들 포퓰리즘 정치쇼를 위해서 각각의 적대혐오를 부추긴 결과이고 그에 따르는 후속대책을 최소한 아베는 갖고 있지만 박근혜는 없다는 것의 차이만 보고 있는거 아닌가 합니다.
  • 바탕소리 2015/12/30 20:23 #

    (호사카 유지 교수님 말씀을 빌리자면) 50:50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외교 당국만의 50:50이라는 지적이 나올 법하지요.
  • 위장효과 2015/12/30 19:53 #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 이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신동우 화백의 만화 한국사-10권 현대한국-에서도 2차대전당시 항목에서 "여자정신대"라는 표현을 써서 표기하고 있었고 그 시기 나왔던 몇몇 중,고교용 국사 참고서에도 "여자정신대"라고 해서 당시 모윤숙등 이른바 여성계 지도인사들이 "정신대에 지원하자!" 라고 연설하면서 친일행위한 것에 대해서 기록한 적이 있죠.
    (정작 나무위키에는 모윤숙이 "학병지원격려연설"한 것은 적어놨는데 이건 빼놨더라고요.)

    게다가 1980년대 문학지라든가 월간지등에 보면 저 위안부 문제를 가지고 쓴 단편소설들도 몇 편 있었습니다. 그중에 아직도 기억하는 건 귀국한 다음 어찌어찌 결혼은 하고 살아가긴 했지만 결코 그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위안부출신)와 그 아들의 이야기(대충 맨날 어머니를 때리고 학대하던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탈상하는 자리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경험을 처음으로 밝히는 줄거리입니다)였습니다. 그러고보니 심각한 건망증인 제가 그 잡지의 그 제호(정작 잡지명은 잊어먹은 주제에)에 실렸던 소설들은 하나같이 기억하고 있는 게 참 신기하네요. 같이 실린 다른 하나는 월남한 아버지가 죽은 어머니(아버지입장에서는 후처)의 묘비에다가 북에 남기고 온 아들 이름을 새겨놓고 아들(주인공이라지만 관찰자)에게도 그 아들을 부탁하는 내용이고, 또 다른 것은 대학생 딸이 자꾸만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반응하길래 원인이 뭔가 찾아보니 검문검색하던 경찰관이 자신의 가방속에 들어있는 여성용 위생용품(거 왜 한달에 한번...)을 보게 된 것 때문에 충격받았다...라는 내용. 어째 하나같이 시사성 있는 단편들 뿐이었습니다(대학가의 검문검색이 일상이던 시대라서 마지막 소설의 현실성이 더더욱 와닿았다고나 할까)
  • 바탕소리 2015/12/30 20:22 #

    그런데 왜 언론에서는 1991년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하는 걸까요.
  • 위장효과 2015/12/30 23:08 #

    왜냐면 대갈거사, 수중왕 시절이니까요. (머이어이)

    "군부독재시절에 저런 개념찬 글이 참고서에 들어갔다고? 믿을 수 없어!!!" 뭐 이런 생각들하는 건 아닌지 몰라요.

    사실 저런 것들도 저같이 이상한 종자나 기억하고 앉았지 누가 그 시절 참고서 한쪽에 적힌 토막글에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게다가 대물려 읽는 책도 아니고 한 해 지나면 다 폐지신세되는 물건이니 지금 남아있지도 않아서 자료로 찾기도 어렵고요. (신동우 화백의 책은 남아 있을 법 한데 말이죠.)
  • 바탕소리 2015/12/31 01:39 #

    아래에도 썼지만 과거에는 위안부 할머니들 스스로와 일본 양측이 입을 닫고 있었으니 그냥 괴담 정도로 치부되지 않았을까요.
  • 김믿음 2015/12/30 21:14 #

    어째서인지 제가 대굴욕이라고 생각하는 현정권 대북협상은

    언론이 과도하게(제 입장에서) 찬양하다가

    전제조건(일본이 헛짓하지 않는거)까지 달리고 사죄라는 표현까지 들어간 대일협상은

    언론이 과도하게(역시 제 입장에서) 까는건지 도통 알수가 없네요.

    아참

    주체가 다르네요. 역시 일본은 모든 프레임가운데 체고조넘.
  • 바탕소리 2015/12/31 00:37 #

    일본을 상대로는 무조건 우리 측 입장을 관철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뭐 사안이 사안입니다만.
  • Demonic Liszt 2015/12/30 21:28 #

    기사내용을 좀 더 따져볼 필요는 있어보입니다. 양김이 배상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시시비비만을 따지자고 했을 당시에도 할머니들이 국가차원의 배상을 요구하고 있었는지 혹은 요구는 그 이후에 나온 입장인지는 기사내용만으로는 알 수가 없네요.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제 무지 탓입니다) 만약 그 이후에 등장한 요구사항이라면 후임 정권들도 곤혹스러운 측면이 있었을 테고 양김시절부터 요구한 것이라면 할머니들의 요구사항을 정부가 무시한 측면도 있습니다.
  • 바탕소리 2015/12/31 01:36 #

    하긴 저런 칼럼들은 기존 기사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류가 있을 수도 있지요.
  • Demonic Liszt 2015/12/30 21:33 #

    제가 71년생입니다만 90년대 이전에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었다는 기억은 안 듭니다. 물론 제 기억력 탓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리고 위장효과님께서 말씀하신 신동우 화백의 만화전집은 저도 갖고 있었는데 그런 식의 언급은 있었다고 기억하지만 이 역시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는 데 기여한 것 같진 않습니다. 아마도 교육만화나 문학작품에서의 언급 등은 있었어도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진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네요.
  • 위장효과 2015/12/30 23:16 #

    그렇긴 한데 여명의 눈동자 원작 소설이 1970년대 스포츠신문에 연재되었던 작품이고, 쓰레기 포르노물이긴 하지만 마루타 같은 소설도 나왔던 걸 생각한다면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3공화국이나 유신시대때는 정부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공론화시키자니 역시 "한일기본조약"이란 게 걸렸을 것이고, NGO들-그때는 제대로 조직도 안된 상태였지만-이 이런 거 들고 나왔다간 그야말로 된통 당했을테니, 알고는 있어도 지금처럼 뭔 일 있을때마다 들먹거리기는 어려웠겠죠.
  • Demonic Liszt 2015/12/30 23:56 #

    위장효과님//

    네. 정부에서도 몰랐다고 보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 댓글의 요지는 정치적 이유에서든 다른 이유에서든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정권이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곤혹스러웠을 테니 굳이 나서서 공론화시키진 않았을 테고 (제 기억이 맞다면) 대중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그 사실을 알았지만 크게 이슈화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90년도 전후 시점이라면 정권의 권위주의적 억압은 대부분 사라졌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국민들 사이에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건 기사 내용에 나왔듯 대체로 그 무렵이 아닐까 싶습니다.
  • 바탕소리 2015/12/31 01:40 #

    아마도 그 시대에는 그냥 괴담 정도로 치부되고 말았을 가능성도 있지요. 당장 일본이 입을 닫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1991년 이후에야 이러쿵 저러쿵 긍정도 해 보고 부정도 해 보고 하고 있지만.

    괴담으로 치부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이유는, 위안부의 실체가 이미 까발려진 상태였다면, 여명의 눈동자나 마루타 등의 소설이 그렇게 성인 소설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고인드립 아닙니까.
  • Demonic Liszt 2015/12/31 14:22 #

    바탕소리 님//

    네. 애시당초 제 개인의 기억에 기초했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긴 합니다만 정치적 이유에서든 대중의 관심이라는 측면에서든 뭔가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는 알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지금과 같이 뜨겁게 다루어졌다는 기억은 없어서요..
  • Cicero 2016/01/01 10:02 #

    그 자신이 위안부가 배치되었던 만주에서 일본군장교로 복무한 박정희가 몰랐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 바탕소리 2016/01/01 10:11 #

    1. http://kastlerock.egloos.com/1158573

     일단 두가지에요. 민주화가 되면서 일본 시민단체와의 연계가 가능해지면서 -이것도 민주화의 영향이라고 봅니다만- 가해자, 아니 정확하게는 가해국과의 교차 검증이 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일본에서도 재일교포쪽에서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용어가 좀 그렇지만 원제가 이러니 넘어갑시다) 같은 연구가 초기에 진행되었지만 일본에서도 반향을 일으킨게 이때라고 보면 됩니다.
     더군다나 양날의 칼로서 종군위안부 관련 연구가 체계화되면서 그것을 2차 대전 연간의 모든 민간인 대상 잔학행위- 실지로 독일 강제 수용소내의 매춘행위와 교차 연구도 있었습니다.-와의 연계라는 학문적인 문제와 함께 정치적인 단체로의 변질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지요. 후자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습니다만...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아아. 종군위안부 문제는 사실 90년대 공론화되었구나"로 알려진겁니다.
     즉 피해쪽에서는 충분히 이해되도 3자나 가해측에서 본격적으로 교차 연구가 시작된게 90년대라고 보면 됩니다.
    - 이준님(블로거)

    대충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되는 듯합니다.

    2. 그런데 박정희 소속은 만주군 아닙니까(비시 프랑스군보고 나치군이라 하긴 그렇지 않겠습니까).
  • Cicero 2016/01/01 10:21 #

    1. 일단 별도 포스팅했지만 70년대에도 위안부는정신대와 혼용되긴 했지만 공식적인 언론의 기획보도에 오르내릴 수준으로 회자된건 사실입니다. 민주화의 영향으로 교차검증과 논의가 이루어진 건 사실이지만 공식적인 인지 밖에 있던것은 아니죠.

    2. 실수했군요. 만주군장교죠.
  • 바탕소리 2016/01/01 10:28 #

    1. 예, 좀더 찾아보니 그렇게 나오더군요.

    2.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694022.html
    그 연원은 박정희 정부를 넘어 이승만 정부까지 올라가더군요.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이 이승만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말입니다. (그 때는 구보타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헛소리해서 파투났다던가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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